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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을 수렁에 빠뜨리는 사람들, 병자호란에서 배우다

거인의서재 2022. 12. 27. 21:43

    "아,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국방을 잊었다. 장수들은 시간만 때우며, 보직 이동만 기다린다. 군인명부의 반은 비었고, 군사는 훈련하지 않는다. 성곽은 무너지고 해자는 메워졌다. 조정에서 다른 관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에게 명이 있다.'라고 하거나 '우리는 성리학의 도를 지키는 나라이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 허균. 『서변비로고』 -

 

 

    허균은 임진왜란 때 아내와 아들을 잃는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의 조선을 상황을 두고 위와 같은 글을 펴냈다. 임진왜란은 1598년 노량해전과 함께 사실상 끝이 난다. 이후 조선은 1627년과 1636년에 연달아 정묘호란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허균의 글을 보면 조선은 임진왜란을 잊은 지 오래인 것 같다. 그렇게 큰 전란을 겪고도 조선은 어떻게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일까. 오늘의 글은 "그냥 지는 전쟁은 없다 (임용한, 조현영 지음)"에서 글감을 얻었다.

 

    가장 큰 원인은 정치에 있었을 것이다. 조선은 명과의 대의명분을 이야기하는 척화파를 중심으로 정치 논쟁에 빠져있었다. 실용적인 대책은 없이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만이 정사의 주를 이루었다. 조정에서 국가의 방향성을 정하고 움직이지 못하니 전란 후에도 변화가 있을리 없었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안위를 챙기려는 이들의 욕망이 더해지면 옳은 것이라도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부딪히곤 했을 것이다. 자리 보전하기 위한 노력은 언젠나 조직을 나쁜 길로 이끌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인조조차도 안위 보전에 힘썼다고 하니 더 이야기할 것도 없다. 무사안일주의, 자리 보전, 이기심, 탁상공론 등이 더해지면 조직이 얼마나 위태로워질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 것이 병자호란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병자호란을 보면서 이전에 다녔던 회사 중 한 곳이 생각났다. 회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일하는 리더들을 보면서, 이 회사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자리 보전을 위한 일을 시작하면, 조직은 제자리 걸음을 하기 시작한다. 우선, 탁상공론이나 반대를 위한 반대가 늘어난다. 내가 잘 보이기 위한 프로젝트를 해야하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명분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아진다. 나의 프로젝트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회사에 도움이 되더라도 반대를 해야 한다.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프로젝트들이 늘어나면 회사의 성장동력은 떨어진다. 성장을 멈추면 인재들이 이탈하기 시작하고, 인재의 이탈은 조직 정체를 가속화한다. 이제는 안위를 보전하는 이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으니, 조직은 깊은 수렁에 빠진다.

 

    조직이 이런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회사에 도움이 되는 사람만을 채용하고 승진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회사의 채용과 평가 시스템이 완벽하다면 가능하겠지만 유사 이래로 인사 시스템이 완벽했던 적은 없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것은 임원진의 능력과 기업 문화이다. 임원진은 시시각각으로 구성원들의 업무행태를 파악하고 누가 정말로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한다.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판단을 내려서는 안된다. 조직에는 리더의 눈과 귀를 가리려는 사람들이 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스템을 이길 수 있는 뿌리 깊은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소통을 의무로 삼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인정받는 문화가 갖추어져야 한다. 부도덕하고 부정적인 행위는 구성원들이 알아서 배척하는 문화가 심어져야 한다. 그래야 조직이 아닌 개인을 위한 행동들이 자리잡지 못한다.

 

    조선도 처음부터 무능력한 국가는 아니었을 것이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조금씩 사람과 문화가 물들어가면서 손쓸 수 없을 만큼 깊은 늪에 빠지게 된 것이었으리라. 조직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무언가에 물든다. 그러니 항상 주의를 기울여서 깨끗하게 가꾸어야 한다.

 

 

202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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