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왜 실패했는가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숨을 거둔다. 그리고 십여년 뒤 기원전 121년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도 목숨을 다한다. 그렇게 그라쿠스 형제가 연달아 눈을 감으며, 두 형제가 이끌었던 개혁도 막을 내린다. 우리는 역사에서 개혁을 시도하지만 실패한 사례를 수없이 만난다. 그리고 개혁에 성공한 사례들도 수없이 만난다. 왜 어떤 개혁은 성공을 거두고 어떤 개혁은 그렇지 못한 것일까? 단지, 운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그 운은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가? 어떤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시오노 나나미는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과격한 개혁을 실패의 원인으로 들었다. 두형제는 모두 호민관의 자리에 있을 때, 개혁을 시도하였다. 호민관은 민회에서 선출되는 직책으로 평민들을 대표하는 자리이다. 호민관 임기가 끝나면 원로원에 들어가게 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원로원과 대립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원로원은 기득권층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라쿠스 형제가 호민관으로서 개혁을 시도한다는 것은 원로원 의원들의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원로원이나 귀족들에게 불리한 법안을 입안하면 이는 원로원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가능성이 높다. 정치도 결국은 감정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귄위에 대한 도전은 언제나 표적이 된다.
역사에 가정은 없으나, 그라쿠스 형제가 원로원 의원, 재무관, 집정관 등의 지위를 가지고 입안을 했다면 같은 내용의 개혁안이라도 더욱 쉽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기득권 내에서 그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제안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 아니다. 정당한 권리이자 의무의 행사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권력을 가져야 개혁을 할 수 있다.'가 아니다. 주요 관점은 내가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기득권층을 적으로 돌리느냐 아니냐에 있다. 간혹 개혁을 말하면서 현 체제나 현 세력에게 악의 축이라는 틀을 씌우는 경우가 있다. 이는 자극적이고 쉬운 방법이기에 종종 이런 방법들이 사용되는 듯하다. 처음에는 이것이 열정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누가되었든 상대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적과의 싸움에서는 더 이상 옳고 그름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적이라는 이유가 곧 싸움의 이유가 되어버린다. 정치는 세력 다툼인 것처럼 보이나, 그 본질은 사회적 합의에 있다. 의회 민주주의에서는 결국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의하느냐에 따라 법안의 통과 여부가 결정된다. 옳은 법이어도 적이 제출한 법안은 통과되지 않는다. 그라쿠스 형제가 놓쳤던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시오노 나나미는 말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말만을 가지고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으나, 나 역시도 이 의견에 충분히 공감했다.
변화라는 것은 어렵다. 나를 바꾸는 것과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조직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고, 국가를 바꾸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기에 변화를 만들 수 있는 현명한 방법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 특히 그것이 다수의 동의를 이끌어야 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출발점은 상대에 대한 인정에 있는 것 같다. 나의 변화가 옳고 너의 불변은 그르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긴 건,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듯한 햇살이었다.
2023.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