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논쟁에서 살펴본 사회적 신뢰 문제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 백선엽 장군(당시 국군 1사단장), 6.25 전쟁 다부통 전투 중 -
"군과 나(백선엽 지음)"는 6.25 전쟁 당시 1사단장으로 전쟁을 맞이했던 백선엽 장군이 종전 이후 전쟁에 대해 남긴 회고록이다. 백선엽 장군은 6.25 기간 동안 1사단장으로 시작해 육군참모총장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1사단장으로 전방에서 전쟁을 맞이했고 이후 다부동 전투, 평양 탈환 등 최전방 작전을 지휘했다. 이후에는 군단장, 참모총장 등의 요직을 거치며 전장을 폭넓게 이끌었다. 육군 최고위직까지 올랐던 인물이 쓴 책이어서 6.25 전쟁을 폭넓고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시민들 앞에서 백선엽 참모총장을 6.25 전쟁의 영웅으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물론, 북진 통일을 이끌기 위한,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행동이었을 수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인물에게도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친일에 대한 논란이다. 백선엽 장군은 만주 군관 학교 출신으로 해방 전 간도특설대 소속이었다. 그런데 당시 간도특설대의 역할은 항일운동 단체를 진압하는 것이었다. 독립군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했던 것이다. 백선엽 장군이 간도특설대 활동을 얼마나 활발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은 사실이다. 친일파인 동시에 전쟁영웅이라 불리는 백선엽 장군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논평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들을 꼼꼼히 따져야 하기에 쉽게 다룰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다만, 백선엽 장군이 불러일으키는 것과 유사한 논쟁이 우리 도처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에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회사 생활을 한번 떠올려보자. 유능한 직원 A가 있다고 해보자. A는 역량이 매우 뛰어나서 회사가 매출을 올리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부서원들을 괴롭히고 공금을 유용하고 거래처에서 커미션을 받는 등의 행위를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경영진은 직원 A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이때는 어떤 가치 판단이 필요할까? 그를 적극적으로 기용해야할 지 아니면 강력하게 처벌해야 할 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현실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문제들은 언제나 명과 암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럼 다시 친일파 논쟁으로 돌아가보자. 친일파였으나 후에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 혹은 친일파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기용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시 이승만 정부에 친일파 인사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은 미군정 아래에 있었고 정부의 형태를 조금이라도 갖추기 위해서는 이미 시스템 내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미군정의 눈길은 대한민국의 미래보다는 현재에 있었을 것이기에 안정화가 목표였을 것이다.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도 교육을 받은 인물들 혹은 공직을 경험했던 이들이 필요했을 것이고 친일파 중 상당수가 여기에 부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선택은 당시에 혼란한 정세를 안정시키는데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면에 있다. 사회 안정화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대한민국이 대가로 지불한 것은 '사회적 신뢰'였다. 즉, 공동체를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심지어는 공동체의 이익에 배반되는 행위를 하더라도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으며 오히려 더 좋은 지위를 보장받기까지 한다라는 메시지가 공동체에 퍼지게 된 것이다. 공동체를 위한 행위나 정의로운 행위보다는 개인의 안위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라는 신념이 깃들게 되는 것이다. 이는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가이나 장기적으로는 공유지의 비극과 같은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니 당시의 친일파 기용은 '당장의 정세 안정화'와 '미래의 사회적 신뢰' 사이의 선택이었다고 압축해서 볼 수 있다. 이는 조직에서 성과지상주의만을 내세워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무시할 때 일어나는 상황과도 유사하다. 앞서 말한 직원 A를 적극 기용한다고 해보자. 눈 앞에서는 큰 성과가 나는 듯하여도 조직의 뿌리를 흔들 수 있는 선택이다. 작은 규칙들이 깨져나가는 모습에 익숙해지면 큰 규칙들도 얼마든지 허물어질 수 있다. 깨진 유리창 효과는 사람들의 본성을 너무나 잘 설명한다.
성과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성과추구로 인해 지불하는 대가가 무엇인지 반드시 살펴야 한다. 신뢰는 유리 그릇과 같아서 한번 깨지면 쉽사리 이어 붙일 수 없다.
2023.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