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고독한 한니발

거인의서재 2023. 1. 23. 21:29

    "저곳이 이탈리아다. 이탈리아에 들어가기만 하면, 로마 성문 앞에선 거나 마찬가지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내리막길뿐이다. 알프스를 다 넘은 뒤에 한두 번만 전투를 치르면, 우리는 이탈리아 전체의 주인이 될 수 있다."

    - "로마인 이야기2(시오노 나나미 지음)" 중에서 -

 

 

    29세의 한니발은 알프스 정상에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로마를 눈 앞에 둔 한니발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와 로마의 싸움이었다. 그 중에서도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한니발이라고 하는 개인과 로마 전체가 싸우는 듯한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 초기 몇 년간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본토에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이후 뒤늦게 한니발에 대한 지원 시도가 이루어지지만 실제로 성공한 것은 두세 차례에 불과했다. 한니발의 두 동생이 각각 군사를 이끌고 지원을 나서지만 한니발에게는 이 지원이 끝끝내 닿지 못한다. 한니발 입장에서 보면 사실상 지원도 거의 받지 못한채 로마와 싸움을 이어간 것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카르타고의 지원 시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병력이 에스파냐, 포강 이북, 시칠리아, 티레니아 해와 이오니아 해까지 분산되어야 했다. 더 많은 군사가 모집되어야만 했고 경제적인 압박도 더 커졌을 것이다. 그러니 한니발이 말 그대로 혼자 싸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이유와 한니발이 받은 지원의 규모를 생각하면 혼자 싸웠다고 표현하는 것이 이해가 간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은 로마로 떠난다. 이때 그의 나이는 29살이었다. 파죽지세로 로마군을 격파했던 한니발의 군대였지만 결국 로마는 손에 넣지 못한다. 전쟁은 길게 늘어지고 그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무려 15년을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고국인 카르타고를 지키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를 뒤로 하고 카르타고로 발검음을 옮긴다. 한니발이 처음 알프스를 넘었을 때, 로마를 반드시 손에 넣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몇 번의 전투만 치르고 나면 로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전쟁이 그토록 길어질 줄은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우리는 한니발의 행적과 전술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의 마음과 생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한니발을 보면서 감탄과 함께 개인으로서 그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 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한니발은 고향과도 같던 에스파냐를 떠나 이탈리아에서만 15년을 머문다. 이 15년은 로마에서 여행을 했던 기간이 아니라 로마와 전쟁을 치르면서 보낸 기간이다. 처음에는 로마가 손에 잡힐 듯 했지만 점점 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늘어만 갔고 본국의 지원조차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한니발을 볼 때 느껴지는 첫번째 감정은 '고독함'이다. 이탈리아 반도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는 타지이다. 심지어 그에게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부하 지휘관 하나조차도 없었다. 전술, 보급, 징병까지 모든 것을 혼자 책임져야 했던 셈이다. 두번째 감정은 '초조함'이다. 한니발은 적진 한 가운데에서 전쟁을 치뤘다. 병력도 물자도 쉽게 지원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것은 현지에서 조달해야 했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병력을 움직인 한니발이었지만,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한니발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시간은 로마의 편이라는 것을 말이다. 전쟁이 교착상태에 접어들면서 그는 시간의 압박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본인이 정복했던 도시들마저도 하나씩 로마에 빼앗기던 전쟁 말기에는 초조감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처음에는 로마에 대한 복수심이 그를 이끌었을 것이라 우리는 추측한다. 그것이 그를 이끈 전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의 복수심조차도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져버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복수를 위한 전쟁이었지만 나중에는 생존을 위한 전쟁이 되었을 것이다. 승리 혹은 죽음이라는 전쟁의 잔인한 얼굴을 한니발도 깨달았을 것이다. 복수라는 감정이 없어진 시점에서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었던 본인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을까? 후회는 아니더라도 체념 정도는 했을 지도 모른다.

 

    손에 꼽히는 지략가인 한니발. 하지만 나의 기준에서는 그의 삶은 행복에서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전투나 전쟁이 주는 쾌감을 나는 알 수가 없다. 승리 한번이 모든 고통을 날려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로 산을 쌓아야만 하는 전쟁이 그에게는 정말로 유흥거리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을까?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한니발도 마음 속에 수많은 고통을 안고 지냈을 것만 같다. 복수라는 감정으로 시작된 한니발의 여정은 고립무원의 세상에서 보낸 15년으로 마무리된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슬프게도 공허와 고독이었다.

 

 

2023.01.23.

 

반응형